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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음악의 변화와 저항의 노래: 식민지 시대의 소리로 그린 민족의식
일제강점기(1910~1945)는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억압과 저항이 공존했던 시기였다. 특히 음악은 민족 정체성을 지키고 집단의식을 고양하는 수단으로 기능했으며, 동시에 일본의 문화 정책 아래 철저히 통제되었다. 이러한 이중적 현실 속에서 한국의 음악 문화는 구조적인 억압 속에서도 민족적 감성을 지켜내기 위한 끊임없는 시도와 저항으로 채워졌다. 본 글에서는 일제강점기 음악의 전반적인 변화와 함께, 그 속에서 탄생한 저항의 노래들을 중심으로 시대적 흐름을 조명한다.
일제강점기 음악 교육과 통제 정책: 민족음악의 말살과 왜곡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일본은 조선의 음악 문화를 체계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의 음악 교육은 일본식 교육과정에 따라 개편되었으며, 한국 전통음악은 철저히 배제되거나 왜곡되었다. 교육 현장에서는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군가와 애국가, 일본 민요와 서양식 작법으로 개작된 노래들이 강제로 교육되었고, 조선어와 더불어 조선의 전통 음악도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구분 교육 내용 영향 조선총독부 공립학교 일본 군가 중심 음악 교육 민족 감성 억제, 일본 충성심 주입 사립 기독교계 학교 성가 및 창가 유지 민족 정체성 간접 보존 민간 악학 및 서당 전통 국악 비공식 교육 비제도권 중심 전승 시도 이러한 억압 정책에도 불구하고 일부 기독교계 학교나 민간 음악 단체에서는 서양음악을 창가나 성가 형태로 교육하며, 민족 정체성을 암묵적으로 보존했다. 특히 창가는 국민 계몽을 위한 수단으로써 일제 초기까지 활발히 쓰였으나, 이후 철저히 검열 대상이 되었다.
대중음악의 발전과 음악 산업의 등장: 일제의 수탈과 민중 정서의 반영
1920년대부터는 도시화와 상업화가 진행되며, 음반 산업과 공연 문화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는 음악의 대중화와 상업화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발전이었지만,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의 통제 속에 놓인 산업이기도 했다. 일본계 음반 회사인 고분샤(古文社), 빅터 레코드 등의 주도로 가요 산업이 형성되었고, 조선인 음악가는 일본 자본에 종속된 채 활동해야 했다.
이 시기 등장한 ‘신민요’는 기존 전통 민요와 달리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요소가 가미된 음악 장르였다. 〈황성옛터〉, 〈사의 찬미〉, 〈목포의 눈물〉 등은 비록 통제된 환경 속에서 만들어졌지만, 한국인의 상실감과 고통을 정서적으로 표현한 곡들로 남았다.
[일제강점기 대중음악 주요 사건]
1925 : 고분샤 조선지점 설립
1926 : 윤심덕 ‘사의 찬미’ 발표
1931 : 이난영 ‘목포의 눈물’ 녹음
1936 : 이흥렬, 정순철 등 가요 작곡 본격화
1942 : 음악 활동 전면 검열 강화
음악을 통한 민족 저항: 항일 운동 속 음악의 역할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한국인들은 음악을 통해 저항의 정신을 지켜갔다. 특히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주의 계열의 지식인들은 음악을 하나의 정신 무기로 활용했다. 이들은 군중 집회나 비밀 결사, 해외 임시정부 등에서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한 노래를 제작하고 전파했다.
대표적인 저항의 노래들은 다음과 같다.
노래 제목 작곡가/작사자 주요 의미 〈광복군 행진곡〉 미상 (임시정부 작사) 독립군 사기 고취, 전쟁의지 고양 〈압록강 행진곡〉 채동선 작곡, 박영희 작사 항일 전투정신 고취 〈건국가〉 주시경 외 민족 재건의 의지 표현 〈애국가〉 (윤치호 가사, 안익태 작곡) 민족 정체성 강화, 국제 외교 활동에 사용 이러한 저항 노래들은 주로 구전되거나 비밀리에 녹음되어 유통되었으며, 독립운동과 항일 운동의 문화적 기반을 형성했다. 특히 ‘광복군 행진곡’은 광복 이후 대한민국 군가로 채택되며 그 상징적 의미를 이어가고 있다.
일제강점기 서양음악의 도입과 이중성: 억압 속의 창조적 수용
일제강점기는 서양음악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도입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선교사 교육기관과 일부 학교에서의 성악, 기악 교육은 서양음악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러한 교육을 받은 이들이 훗날 한국 음악사의 중요한 인물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는 식민 통치 하에서 제한적, 비제도적으로 이뤄졌으며 음악의 자유로운 표현은 철저히 통제되었다.
구분 대표 인물 활동 내용 작곡 홍난파, 채동선 서양 작법에 기반한 창작 활동 성악 김금호, 정정렬 성가 중심, 이후 가곡 및 오페라 활동 교육 안익태 유럽 유학 후 교향곡 및 애국가 작곡 이 시기의 음악인들은 서양음악의 형식을 수용하면서도 민족적 정서를 담는 방법을 고민하였다. 홍난파의 〈봉선화〉, 채동선의 〈압록강 행진곡〉 등은 민족의식과 서양음악의 접목을 시도한 대표적 결과물이었다. 이는 이후 해방과 더불어 한국 현대음악의 주춧돌이 되었다.
음악으로 남은 기억: 일제강점기 음악 문화의 유산과 오늘날의 의미
일제강점기 음악은 단순한 예술 활동을 넘어서, 억압과 통제, 상실과 저항이 교차된 복합적 문화현상이었다. 이 시기의 음악은 민족의 아픔을 노래하고, 정체성을 지켜내며, 희망을 품게 만든 소리의 기록이다. 일제가 남긴 검열과 동화 정책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저항의 멜로디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
이러한 음악 유산은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정체성과 자유, 민족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승해나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문화적 지표다. 일제강점기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은 단순한 역사 회고가 아니라, 오늘날 문화 주체성을 되새기는 과정이자, 음악이 가진 사회적 힘을 되짚어보는 중요한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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